naked pencil

평일 낮 시간대의 행복을 점검해 보고 있다. 물론 여행이나 취미 생활 같은 기분 전환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전환해야만 할 정도의 피곤한 일상... 이란 것도 생각해 보면 갑갑한 일이니까. 새로 온 회사 책상에는 없는 게 많았지만 ("새로 온 회사 책상"이라는 건 "신입사원인 나"와 비슷해서, 얼추 정돈되고 반듯하고 깨끗한 듯하지만, 묘하게 긴장되어 있고 주변과 어울리지 못해서, 저 자신은 최대한 조용하고 간결하게 있는다고 애를 써도 여하간 튀는 그런 존재다.) 그 모서리 쪽에 연필깎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고등학교 때 쓰던 것과 같은 스테들러 사의 모델이었는데, 새것은 아니었지만, 새것이 아니어서 정감이 갔다. 사실 paper work를 한다고 해도 흑연을 충분히 소비할 기회는 많지 않다. 샤프 대신 연필만을 이용한다고 해도 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연필을 깎게 되는 일은 드문 걸 보면 분명한 것 같다. 보통은 이삼 일에 한 번, 뭉툭해진 연필 끝을 발견하고 연필깎이를 손에 든다. 색연필용인 큰 구멍은 사용할 일 없어 그 부분만은 새것처럼 깨끗하고, 작은 구멍만 숯검댕을 묻힌 굴뚝 청소부 같은 얼굴을 하고 소임이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연필은 회사에서 준 걸 쓰기 때문에, 독자 사은품으로 쓸 겸 만들었던 재생 연필을 깎는다. 신문을 돌돌 말아서 만든 이 연필은 깎이면서 글자, 숫자, 이따금 느낌표나 꺾쇠 같은 부호들이 적힌 부스러기를 흘린다. 의미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애초에 고안되었던 의미를 벗는다.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