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행.
설레는 여행.
짧은 여행.
가볍다면 가볍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여행은 이렇게도 수식된다. 고단한 삶과, 흥미진진한
삶, 평탄한 삶과 행복하고 안락한 삶, 그냥 삶, 대단한 삶, 보잘것없는 삶이 있을 수 있듯이 ‘여행’이란 건 가치중립에서 출발해서,
굉장히 주관적인 수식으로 덧입혀지는 개념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 말했든
여행의 스펙트럼이란 무궁무진하므로, ‘나는 여행이 좋’지만
‘여행이 싫’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어릴 적에는 몸을 혹사시키는 여행이 좋았다. 아주 간단하고, 짧았지만, 죽을 만큼 힘들고, 그런데도
나는 살아남았어, 라고 무용담처럼 말하는 종류의. 조금 나이를
먹자, 체수분은 일정량 유지하고, 배고프기 전에 적당한 시간이
되면 연료를 채워 넣는, 일상적인 여행이 좋아졌다. 투어리스트보다는
주민 같은 느낌으로, 같은 숙소에 일주일 단위로 묵는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그림 실력이 좋아지는 진짜 비밀”을 골라 읽었다. 팁에 대해 항상 굶주려 있던 탓이다. 지은이는 ‘관찰’이라고 한다. 욕심
없이 편견 없이 목적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아니라, 그려 주마, 라고 마음먹은 풍경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피곤하면 대충 보기도 한다. 급하면 뛰어
지나가기도 한다. 약속 시간에 한참 여유가 있으면 일부러 돌아간다. 그
보폭의 속도와 관찰의 정도에 맞는 드로잉을 해본다. 외관의 관찰 더하기 내 속에 있는 내면의 풍광을
그려 내는 거. 어쩌면 정직하고, 지극히 사적인 관찰이 될
것이고, 운이 좋다면 굉장히 다채로운 드로잉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다. 마음이란 늘 부유하기 마련이므로.
“손을 씻다가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놀라운 건 그것이
몇 년이 지난 일이라는 사실.
불과 며칠 전 일인
줄 알았다.
1년이 지났음에도 또는 몇 년이 지났음에도
바로 어제 있었던
일 같은 기억들이 있다.”
기억이 “방부제 먹”었다는 표현이 좋다. 무심코
스케치하게 되는 것도, 방부제 먹이기의 일환일지 모르겠다.
“그림 한 점의 영향력”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닌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아니 그릴 수 있는 이유는, 그릴 권리가 마땅히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권리에 대하여는? 생각해 본
일 없다. 하지만 아무리 작고, 사소한 문화라도 영향력을
원천 차단하기는 어렵겠다고 인정했다. 나는 그럼 이제부터 “중압감”을 가지고 드로잉해 봐야겠다. 종이를 한 손 가득 꾸기고는, 뒤도 안 보고 던져도 봐야겠다. 이 글 뒤에 삽입된 끌로드 모네의
“The Blue House in Zaandam” 그림이 너무도 좋아서, 한참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