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전차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기가 지나고 다시 해가 나기 시작하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비에 흠뻑 젖었던 주위의 벽돌과 콘크리트 표면이 말라 가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전차와 자동차가 동시에 오가는 철교 위였다. 철길 한쪽으로 언덕을 따라 한 무리의 지붕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마치 집들이 언덕 비탈로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너머 조금 떨어진 곳에 우리 아파트가 네 개의 콘크리트 기둥처럼 서 있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적어도 한동안 사치코는 내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오후 주택가를 막 벗어나는 골목길에서 내 앞에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종종걸음을 놓는 나와 달리 사치코는 안정된 보폭이었다. 그즈음 우리는 이미 서로의 이름을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내가 다가가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ㅡ가즈오 이시구로, <창백한 언덕 풍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