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란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속독에 관해서 나는 이렇다할 정의를 내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한편, 이렇다할 정의를 내리는 데 어떤 두려움을 갖지도 않는다. 틀려도, 그만이다
내게 속독은 내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독법이다
내 시선이 지그재그로 혹은 일직선으로 혹은 사선으로 혹은 방사형으로 아무렇게나 운동할 때, 그 속도를 발성기관은 따라잡지 못한다. 이 문장을 생각하기 전에 내 눈은 저 문장으로 건너가 있다. 기계적인 움직임이다. 반대로 속독 이외의 모든 유형의 독서법에서 나는 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엠마를 읽을 때는 오스틴이, 산유화를 읽을 때는 김소월이 되는 수는 없고 오로지 김미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통 독서라는 행위의 유익한 점에 대해 언급할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그 <간접경험>이라는 키워드는,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것에 해당한다. 출판사라는 지극히 정제된 작업공간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러니까 내 해독의 독선적인 면이고... 그렇고, 또... 매일밤 잠들기전 나는 자기정체성의 확인에 덤으로 딸려오는 지리한 모멸감을 받아들이는수밖에 없다
요며칠새에
친구와 서로 쓴 편지를 직접 읽어주면서
낭독회에 가서 작가의 육성을 통해 작품 한토막을 들으면서 엄청난 도탄과 환희에 빠졌음은 물론이다. 나는 기억력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 언제까지고 타인의 목소리로만 읽게 되는 텍스트를 손에 넣었다. 윤이 나고 때가 절을 때까지 나는 이걸 조물락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