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증발이란 없다.
한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존 업다이크, <토끼는 부자다> 중에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
등등
뜨거운 물을 머그에 담는다
핫팩, 도시락 용기 등을 드느라고 머그컵을 든 손에 충분히 신경을 기울이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고 사무실은 지하
예상대로 계단을 내려가다가 물을 조금 엎지른다
손에도 뜨거운 물이 흥건하다
참는다
컵은 깨지 않는다
화상인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손을 씻으려다 괜찮은 것 같아 그냥 대충 티슈로 물기를 닦는다
30분 뒤 손끝이 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손바닥이 욱신거리는 것도 같다
물이 반밖에 담기지 않은 머그를 바라본다
마셔본다
의심없이 들이킨다
안전하다
이 액체는 확실히 미지근하다
당신은 30분만에 식은 물이, 그것이 가지고있던 에너지가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드나? 물론, 그것도 그렇다. 쭈욱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이다, 나도
그러나 오늘은 좀더 다른 견해로...
나는 30분이란 시간의 위력에 놀란다. 실내의 싸늘한 공기에 기가 죽는다. 그리고 이 모든 충격을 그대로 흡수하고 내보란듯 하는 이 물렁하기도 하고 질기기도 한, 무디기도 하고 예민하기도 한 이 왼손에(나는 왼손잡이다), 그것의 감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