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남산국악당에서 시연되는 노가쿠를 보러 갈 기회가 있었다.
일찍 도착해서 한옥마을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학부 시절에는 일본 전통 공연에 관심이 좀 가서 노 말고도 가부키나 조루리에 대해 찾아보기도 했었는데 정작 일본에 가서는 티켓 값이 없어서 유명한 가부키좌 근처 거리에서 다코야키나 먹고 와 버렸었다. 공연은 생각보다도 흥미롭고 내용도 충실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성 싶다.
연출가이자 배우이기도 했지만 노를 근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간아미, 제아미 부자의 얘기를 들으면 늘 보편적인 매뉴얼로 정착되지 못하고 몇 대의 인간에게 한정되고 마는 손에 잡히지 않는 한국의 전통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에도 한국식 전통 간장을 만드는 할머니가 나왔는데 제자를 키우고 싶어도 마땅한 청년이 없다는 얘길 들었다. 간장을 만들러 가야 할까나.
어쨌거나 그 공연 관람은 제아미가 쓴 노 관련 이론서인 <풍자화전>을 직접 구해서 읽어보는 계기를 주었다. 다음은 책에 있던 해설을 발췌한 것이다.
노라는 고전극은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주인공 1인 중심으로 진행되는 극이다. 조역도 있지만 주인공의 대사를 이끌어내는 역할에 불과하고, 주인공이 등장해 입을 연 이후에는 여타 인물들은 거의 함구하다시피 한다. 주인공은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 가면극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노가쿠(能樂)라고도 불리며, 가부키(歌舞伎)와 함께 일본인들이 세계에 자랑하는 전통 예능이다. 그 대사를 가리키는 요쿄쿠(謠曲), 음악적 측면의 총칭인 하야시(囃子), 연기나 춤 등 무대 위에서의 움직임을 가리키는 쇼사(所作) 등이 3대 요소라 할 수 있으며, 이들 각 요소들로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종합예술이다. 가부키와 흔히 비교되곤 하는데, 가부키가 주로 현실 세계를 그리는 것임에 비해, 노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초현실적 몽환(夢幻) 세계를 그린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노는 주로 신이나 유령 등의 초현실적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가부키의 현실적 장면 전개와 사뭇 다르다. 시대적으로도 노가 중세 후반에 완성되었음에 비해, 가부키는 그 다음 시대인 에도(江戶) 시대에 완성되어 유행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주요 향수층에 있어서도, 가부키의 그것이 일반 서민들이었음에 비해, 노의 경우는 귀족이나 무사 등의 상류 계층이 그 주요 향수층이었다는 점에서 두 고전극이 뚜렷이 대비된다. 노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그 시작은 나라(奈良) 시대(710∼794)에 중국에서 전래된 중국의 속악(俗樂)인 산악(散樂)에서 유래된다. 이 산악이라는 용어의 ‘산(散)’이라는 글자는 원래 ‘흩어지다ㆍ쓸데없다’ 등의 뜻을 지닌 말로, 품격을 중시하는 궁중에서 우아하게 행해지는 아악(雅樂)에 비하여 비속하고 대중성을 띤 무악(舞樂)이라는 점에서 이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 산악은 헤이안(平安) 시대(794∼1192) 이후 가무(歌舞)나 흉내 등의 익살스러움이 가미된 사루가쿠(猿樂)로 발전하고, 이 사루가쿠의 가무적인 측면을 간아미ㆍ제아미 부자가 보다 세련되고 깊이 있게 그 예술적 수준을 끌어올려 노를 완성한 것이다. 특히 제아미(世阿彌)는 상징성 높은 유현(幽玄)의 세계를 지향하여 재미 위주의 연기적 측면보다는 인간 내면의 깊이를 중시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풍자화전(風姿花傳)≫이 이루어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서기 1400년경이다. 이때가 노의 역사상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노는 이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지금은 많은 일본인들의 애호 속에 활발히 공연되고 있다.
노는 가부키에 비해 그 표현이 지극히 상징적이어서,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의 행동에는 극도로 양식화(樣式化)된 절제미가 흐른다. 공연은 대개 정해진 형태의 무대가 설치된 전용 극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극히 양식화된 무대예술이기 때문에 일정 양식의 무대가 없으면 상연 그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양식화 현상은 무대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요소에 두루 보인다. 예를 들자면, 등장인물의 움직임, 발성법, 각종 무대 장속(裝束) 등등. 어쩌면 일본 전통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이 양식화 현상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러한 현상의 극치를 노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게 정해진 틀 속에서 엄격히 규격화되어 거기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날 듯 여기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다. 그래서 무대 위에 서는 배우를 위시하여 그 밖의 각종 관계자들은 한 치의 오차도 발생되지 않도록 마음 졸이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이 연습을 가리켜 일본인들은 ‘게이코(稽古)’라 부르는데, 원래는 ‘옛일을 자세히 알아봄’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며 우리말 사전에도 ‘계고’라는 말로 올라 있다. 이 말을 ‘수련’의 뜻으로 쓰고 있음은 옛것을 귀히 여기는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한 측면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전통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그들의 각종 무형 문화유산을 예로부터 정해져 내려온 기존의 틀 속에 한정시켜 양식화의 방향으로만 몰고 간 측면도 이 ‘게이코’에는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들은 이것을 중시한다.
≪풍자화전≫의 주제도, 무대 위에서 예술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 연기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수련’의 태도를 제시하고 강조하는 데에 있다. 제목 중의 ‘풍자(風姿)’라는 말은 ‘예술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모습’이라는 뜻을 지녔으니, 그러한 ‘연기 모습에 예술적 매력으로서의 꽃을 개화시키기 위해서 연기자들이 알아야 할 비결을 써서 전한다’는 뜻이 ≪풍자화전(風姿花傳)≫이라는 책명에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다. 전체적인 체제는 전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7편 구성 체제가 필자 제아미의 일관된 구상하에 순차적으로 집필되어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 성립 과정에 관해서도 다소 불확실한 측면이 있긴 하다. 다만, 제1편 <각 연령에 따른 수련법의 갖가지>에서 제3편 <문답 갖가지>까지가 제3편 말미의, 1400년 4월 13일에 완결 지었다는 기록대로 제1차분 저술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제4편 <사루가쿠의 기원 전설>은 앞의 제3편까지의 내용들과 다소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긴 하나, 이것도 제1차분 저술이 나온 시기와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다음의 제5편 <오의>에는 발문에 1402년이라는 연도가 명기되어 있어 성립 시기가 확실하다. 그다음의 제6편 <꽃을 체득하는 비결>에는 성립 연도가 적혀 있지 않으며 문체도 이전과 다소 다른 데가 있어 상당 기간이 지나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제7편 <별지구전>의 말미에는 1418년에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보여, 앞부분의 제1차분 저술과는 상당한 시간적 괴리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별지구전> 편에 관해서는 제3편 에 이미 그 존재를 암시하는 내용이 보여, 제1차분 집필 중에 필자가 이미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필자 제아미의 나이로 계산해 보면, 38세 때부터 56세 때까지 장장 18년간의 집필분을 모은 것이 되겠다.
각 편의 내용에 관해 간략히 언급하면, 우선 제1편 <각 연령에 따른 수련법의 갖가지>에서는 제목 그대로 연령마다의 수련법과 마음 자세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노의 길에 들어선 연기자 본인의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그러한 길을 걷는 어린 수련생에 대한 배려에 관해서도 세세히 적고 있어, 필자 제아미의 치밀하고 섬세한 성격이 엿보인다. 제2편 <연기 수련법 갖가지>에서는 연기의 대상이 될 대표적 배역 아홉 가지를 들어 저마다의 유의 사항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제3편 <문답 갖가지>에서는 가상적 인물에 의한 문답의 형태로, 실전적인 문제나 수련이나 연기 관련의 제반 사항, 그리고 연기적 매력으로서의 ‘꽃’에 관한 이론 등을 제시하고 있다. 제4편 <사루가쿠의 기원 전설>에서는 노의 역사를 적고 있는데, 다른 편에 비해 다소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문체도 약간 다른 것으로 보여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제5편 <오의>에서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노 관련 이론의 진수를 정리하듯 기술하고 있으며, 말미에는 이 ≪풍자화전≫이라는 저술이 선친의 유훈을 토대로 쓴 것이지 결코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쓴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선현을 치켜세우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 미덕이었다니, 이 기술로 저자로서의 제아미의 독자성을 의심하여서는 아니 될 듯하다. 제6편 <꽃을 체득하는 비결>에서는 노의 제작법 관련 제반 사항에 대해 작품론ㆍ연기론ㆍ연기자론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제목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이 제6편의 주제는 ‘어찌하면 연기의 꽃을 개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비결의 제시’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제3편 <문답 갖가지>와 내용적으로 겹치는 데가 있어 관련성이 깊다. 마지막으로 제7편의 <별지구전>은 말 그대로 별지로서 집필된 것이며, 여태까지의 ‘꽃’ 이론을 총론적으로 정리한 내용으로 판단된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 ≪풍자화전≫이라는 작품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기 이론서로서, 이후에 나온 제아미의 이론서들의 토대 역할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오늘날의 노 연기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역작으로 평가되며, 노뿐만 아니라 그 밖의 예능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명저로서의 평가가 자자하다.
가장 느리고 긴장되는 진지한 성격의 공연이기 때문에 이 에세이집이 인생에 관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역시 지금의 나에게도 <게이코>가 분명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어쩌다 젊은 시절에 얻는 <꽃>은 운에 따라 얻을 수도 있고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상당한 연륜이 된 자로서는 나 나름의 <꽃>을 피우고 타인에게도 선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